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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생각하다
장일호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여성학자 정희진씨가 그랬던가. 나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진실’들을 알게 되는 것들이 두려웠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무력한 내 자신을 깨닫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막연한 채로 두고 싶었다.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에 일어나는 일쯤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내 앞에 놓인 문제만으로도 벅차다며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의 자유가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때면, 순간순간 목이 메이곤 했다.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지배이데올로기와 대중매체가 말하는 것 이외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중요한 게 아닐까? 내가 그렇게 두려움과 마주보기로 결심했을 즈음, 우연히 임영신씨의 강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평화를 믿나요?’라는 주제를 가만히 따라 읽어보며, 선뜻 믿는다고 대답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평화, 그 아름답고 따뜻한 단어를 생각하는데 깊은 회의가 몰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믿는 평화가 무엇인지, 그녀가 바라본 전쟁의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낯설고 소박한 강의실에 들어서며, 쉽게 감정적이 되곤 하는 나를 추슬렀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으며 객관적인 진실만을 취하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강의가 시작되고 울먹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느새 내 마음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겪었던 슬픔이, 비극 속에서도 꿋꿋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내 심장을 꾸욱, 내리 눌렀다. 동정심은 독일어로 mitleid이다. 단어를 쪼개보면 mit은 영어의 with이다. leid는 고통이라고 번역하면 대충 맞다. 즉 mitleid는 고통을 함께 느껴주는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 마음 아파함, 나는 감히 그 마음을 평화의 시작라고 정의 내려본다. 우는 것으로 평화가 오진 않지만, 타인의 고통에 울 수 있을 때 평화가 시작된다던 캐시 캘리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의 방식이외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그것이 나의 가치관과 다르고, 때론 무모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한 나름의 방법임을 인정해야 한다. 전쟁과 폭력은 그것을 무시함으로서 시작된다. 단순한 무시가 아닌, 강요와 간섭을 동반한다. 자신들의 속셈은 감춰둔 채 전쟁의 명분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뻔뻔한 그들에게 나와 남의 다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본’과 ‘무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당하는 사람을 길들여 똑같은 폭력을 생산한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 수많은 내전과 테러가 횡행하는 까닭이다. 폭력을 몰아내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게 우리시대의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영신씨의 평화여행은 그 역사를 어떻게 써나가야 할지를 제시한다. 역사와 기억,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 희생자의 편에서 귀 기울이는 여행, 그 여행이 저항과 운동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평화는 진보의 영역이 아닌 양심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강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평화를 믿는가를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믿고 생각하는 평화는 무엇인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고민하게 하는지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 보기 원했던 시간들, 따뜻했던 그녀의 강의는 앞으로 내 삶의 어떤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날의 기억으로 나는 3월 17일 씩씩하게, 그리고 기꺼이 국제반전공동행동에 참여하였다. 생각하는데로 행동하기 위해서,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비웃는다.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네가 그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온 세상이 전쟁으로 신음할 때, 오늘의 행동을 비웃은 이에게는 분명 책임이 있다. 희망과 절망의 공존 속에서 한걸음씩 나아가며, 느리고 긴 호흡으로 평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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