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재41차 문화나눔마당 강연요약]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그대 지금 갈망하는가” 저자)

일시 : 2011년 1월 27일(목) 저녁 7시30분
장소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강의실

027.jpg사람에게 변화를 주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책이나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 Life Story를 이야기하면서 매시기마다 느꼈던 고민, 근원적인 갈망,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 새로 나온 책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어린시절 많은 시간을 집과 성당에서 보냈습니다. 6남매의 막내였고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몸이 약해서 학교에서 개근상을 탄 기억은 없지만 성당에서는 받았습니다. 선생님과 신부님이 어린 시절 꿈이었는데 지금은 결혼해서 사제의 꿈은 접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 아직 그 꿈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반에서 가장 가난한 친구를 도와주는 흑룡단이라는 모임(나중에 무궁화의 이니셜인 NGH 로 바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성당이 준 좋은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는 한편 “부자에 대한 적대감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짗궃은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레지오 마리애 부단장을 했는데 단장이셨던 선생님이 수녀원에 입회하셨다가 저에게 신학교에 가라고 권유하러 잠시 나오기도 했습니다. 수도회인 예수고난회 입회를 생각했었는데 친구가 빌려준 소설 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이문열 “사람의 아들”, 김성동 “만다라”을 읽고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 가차없이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 그리고 신약에서의 구세주 탄생의 예고를 들은 헤로데왕의 어린아기들의 참혹한 학살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대자대비하시다던 하느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고3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대학생과 성경공부를 했었고 왕국회관의 구경을 가본적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의 신앙에 대한 헌신, 충성심, 공동체정신, 비폭력주의 등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여호와의 증인과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신앙고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사람의 삶이 불평등할 지언정 더 많은 사람들의 불평등 해소 쪽으로 역사가 흐르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도서부 선생님이 추천해 준 도서가 두권 있는데 판금서적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습니다. 어렵게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구해서 보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그리고 신앙을 지속하기 위한 마음에(서강대는 예수회가 세웠음으로) 서강대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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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들은 정양모 신부님의 “그리스도교 신앙개론”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아담과 하와, 예수탄생때 아기들의 학살은 “인간의 탐욕, 독점으로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을 신학적인 의도로 만들어낸 설화요 이야기일 뿐”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예수가 그 아기들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지 않았다면 신앙은 의미가 없다. 예수의 죽음은 그 아기들보다 30년 뒤로 유보되었을 뿐으로 그 아기들처럼 죄 없이 무고하게 죽었다. 인간들이 고통 받는 그 현장에 하느님도 함께 고통 받고 계시고 인간들이 아파하고 슬퍼할 때 하느님도 아파하고 슬퍼하고 계시다”는 메시지는 고등학교 때 읽은 김성동의 “만다라”와 겹치는 이미지였고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갈증을 일시에 해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따르고 싶은 모델이기 때문인 것이고 이제 내가 그렇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후의 삶은 이런 복음적 확신에 대한 근거를 만드는 과정이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학교에서는 가톨릭대학생회를 하면서 야학교사를 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는 유물론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87년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을 했고 그해 개봉된 예수회 신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션”을 보고 서강대 예수회 청원자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또 제3세계신학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해방신학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공부했는데 거기에 나온 중남미의 빈민들과 함께 생활했던 마누엘 신부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내가 신부가 아니라도 이 길을 갈까?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어도 이 분들과 함께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는 “내가 사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이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명령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면 나의 삶은 불순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사제 안하기로 신자안하기로 무신론자로 남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삶을 계속 살았고 임종전 하느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 내가 무신론자로 살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제 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라”도 힘든데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가 아니라이건 더 나아가 “사랑하라, 희망없이”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얼마후 여자 대학동기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위장취업해서 노동현장에 들어갔던 그 친구는 신부가 될 거라는 제 이야기에 종교는 관념론이고 인민의 아편이기에 신학교 가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습니다. 그녀에게 나의 신앙을 설명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삶으로서 해명할 기회를 읽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교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교황 레오13세의 노동헌장반포 100주년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노동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때마침 필리핀 연수의 기회가 생겼고 거기서 여성노동자운동을 하는 수녀님을 만나서 노동신학 자료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수녀님은 “어느 노동자가 당신에게 신학을 해달라고 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이 신학을 하면 그것이 노동자에게 도움이 됩니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노동신학의 주체는 노동자여야 했습니다. “참사람되어”의 한현 선생님과 의논후 노동자로 살기로 했습니다. 노동신학을 하기 위해서, 객관적 제3자의 관점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들과 그들의 삶에 생기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공장 노동자의 생활, 노동운동 활동가가 되라는 선배의 권유, 아내와의 만남 후 가톨릭노동사목협의회 간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에 지하철노조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는데 사목위원들이 천막을 깨부셔서 쫓겨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조계사로 옮긴 노조원들이 스님들과 수박을 깨 먹으면서 환하게 웃는 사진이 한겨레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손님과 불청객”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라면 그들을 내쫓았을까?”하는 내용의 글을 썼는데 이글을 같이 일하던 분이 전국의 성당에 팩스로 넣었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어 어느 신부님에게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판에 대해 반응을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기뻤습니다.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를 하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계속 맞고 있습니다.

가톨릭사목협의회의 장학금으로 서강대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선”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일을 했으나 재정바닥으로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병을 얻었습니다. 스트레스와 영양실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낭만을 찾아서(?)” 별빛이 아름다운 무주에서 시골생활을 했습니다.

평소에 시각매체에 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주변의 예술치료를 배우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지금은 만남을 통해 개개인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심리치료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김지하 시인의 글에서 영향을 받았고 규칙을 싫어하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나온 개념이 “시와 혁명의 통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자신과 세상의 동시적인 변형”, “모성적인 하느님과 부성적인 하느님의 내 안에서의 통합”, “남성적인 기개와 여성적인 오묘함의 한 인격 안에서의 통일” 같은. 그리고 이 출발선에서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하는 물음이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밤은 저물고 길은 멀지만 관념론이 아니었던 실천적 삶을 살았던 분들. 매일미사를 하며 환대의 집을 열었던 도로시 데이나 자기가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깨알 같이 적어두고 날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기도를 했던 시몬느 베이유처럼 관념론이 아닌 구체적 신앙을 증거했던 이들. 또는 무신론자로 살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던 마누엘 신부처럼 마지막 순간 “그래도 이정도로라도 살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릴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마음이 그분과 닿아있다면 그것 역시 의미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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