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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42차 문화나눔마당 강연요약]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
리정애(재일동포,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
일시 : 2011년 2월 18일(금) 저녁 7시30분
장소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강의실
리정애는 조선사람
지금 저는 법무부에서 조선국적자도 한국동포라는 견해를 내놓아서 이 땅에서 살고는 있지만 주민등록증이나 의료보험 같은 혜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적(朝鮮籍)을 끝까지 지키고 살 것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저는 “너는 조선사람 리정애다”라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20대까지는 제사가 싫었습니다. 밤늦게 까지 특히, 여자만 일을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한민족임을 느끼는 유일한 마당이었습니다. 우리학교를 안다니고 일본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학교와 제사가 없었다면 일본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중1 서머스쿨 때 전국의 동포들이 모였는데 그렇게 많은 동포들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조선민족으로 태어나서 좋았다”, “조선사람 최고”라는 말을 들었고 “조국통일”이라는 말을 처음 배웠습니다. 많은 것을 느꼈던 자리였습니다.
재일외국인들은 16살이 되면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지문날인을 해야 합니다. 일본인은 범죄자 외에는 지문을 찍지 않습니다. 그때 지문날인을 거부한 동포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동포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일본학교에 다니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조선대학교에 편입을 했습니다. 우리말을 전혀 못했는데 “우리말 100일간 운동”을 통해 동포학생들과 함께 샹활하고 연극 등 프로그램을 하면서 우리말을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4학년때 조국강습으로 공화국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통일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총련산하단체에서 일꾼으로 있었고 민족학급(일본학교 다니는 동포학생들에게 우리말, 문화 가르치는 것)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회사에서 무역사무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언젠가 개성공단에서 일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정애의 남쪽방문기
2004년에 남쪽에 처음 왔는데 그때 친척들과 설악산과 동해를 여행했습니다. 2005년에는 역사탐방 투어로 왔었습니다. 815민족대축전, 나눔믜집,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답사했습니다. KIN(지구촌동포연대) 분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우리말을 더 잘하고 싶어 고대어학당에 들어갔고 민주노동당 사람들과 민족21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족21 기자의 권유로 제 이야기가 만화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2007년 임시여권을 신청할 때 그 신청이유에 “부산에서 열린 8?15민족대축전에 참가”라고 썼는데 영사가 직접 전화해 “총련조직에 출입하는가?”, “조선대는 언제 졸업했는가?”, “북쪽은 언제 갔는가?”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떨리기도 했지만 “총련이 없었으면 일본에서 우리 권리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영사님과 우리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총련의 민족교육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우리말 잘 하시네요”하는 칭찬도 들었고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1월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금강산도 갔고 장기수 선생님들도 만났습니다.
2009년 이번 정권 들어서면서 입국절차 등이 점차 까다로와지고 입국불허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계속 입국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사관에서 고압적으로 “왜 국적을 바꾸지 않는가”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임시여권을 만들 때 나중에라도 국적을 바꾸겠다는 서약을 형식적으로라도 해야 했는데 그때는 너무 열받아서 “이전 정권이라면 몰라도 이 정권에서는 창피하서 국적을 바꾸고 싶지 않다”라고 쏘아붙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상견례라는 이유가 있어서인지 입국허가가 나기는 했습니다. 9월들어 쳬류연장신청을 하려 했으나 외교통상부에서 상부지시라고 허가하지 않아 울면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11월 남편인 김익씨 여동생 결혼 참가를 이유로 신청을 했으나 다시 입국이 거부되었습니다.
2010년 3월과 7월에 결혼을 이유로 입국하신청을 하였으나 불허가 되었습니다. 10월 결혼을 위해 결혼식장도 잡았고 청첩장도 제출했는데도 계속 안된다고 했습니다. 7월말 민족21에 “국적이 조선이면 마음대로 이산가족 만들어도 되나요?”하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후에 영사관에게서 전화가 왓습니다. 그때도 “왜 국적을 안바꾸는가”를 가지고 계속 지루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거기에 “통일 전에는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고 맞섰습니다. 그러나 결혼식이기에 입국허가는 해주겠으니 국민등록만 하라고 했습니다. 영사의 말이 너무나 교묘했습니다. 국민등록이란 외국인등록증에 “조선”을 “한국”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8?15가 지나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815만 되면 원폭피해를 강조하며 그에 대한 뉴스, 방송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피해자는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그 시기에 일본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2005년부터 8?15는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우리땅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일이 많았기에 먼저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종로구청에서 했는데 언론사가 오기 편하게 하려는 나름의 배려(?)였습니다. 혼인신고서에 본관 쓰는 란에 제주도의 고향을 쓰려 하니 없는 동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의 뿌리가 없어졌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인신고 일주일후 확인서를 보니 “무국적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국인으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취직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입국관리소, 외교통상부, 오사까영사관에서 들은 이야기는 결혼식만 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살려고 결혼을 했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KIN과 공감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다시 출입국관리소를 찾았습니다.(이번에는 KBS 카메라와 함께 갔습니다. 한결 친절해진 직원들의 태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적도 한국국적자”라는 법무부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커다란 동화정책의 일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체류기간을 갱신해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가지고 있는 재입국허가서(일본을 출입할 때 필요한 서류)의 만료기간은 2012년입니다. 그래서 2011년 말에 일본에 가서 다시 신청을 하고 2012년 초에 다시 한국으로 올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부모님도 계시고 하니 계속 왕래는 해야 할 텐데 아마 영사관에서는 허가를 안내주려 할 테니 그 시기에 큰 싸움을 해야 할듯합니다.(현재 오사카 총영사는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을 지시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
일제시대까지 재일조선인은 일본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후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조선인들은 일본국적을 잃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로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조선인의 국적이 아닌 외국인으로 됩니다. 1947년 “외국인등록령” 시행할 때 국적란에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국적을 적어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조선적입니다. 그 이후에 분단이 되었습니다. 한일수교로 일본이 한국정부는 인정하지만 북쪽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실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국적은 일본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선적이라는 국적은 있는데 국가가 없는 난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영학, 정대세 그리고 이충성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세명의 축구선수에 대해서 언론에서도 정리가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안영학 선수. 안영학 선수는 조선적입니다, 고등학교 까지 우리학교를 다녔다가 일본대학을 가고 J리그를 거쳐 공화국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정대세 선수는 계속 우리학교를 다녔 조선대를 거쳐 공화국 대표가 된 경우입니다. 어머니가 조선적이고 아버지가 한국국적이십니다. 그래서 한국국적이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가 된 경우입니다.
이충성 선수는 초등학교 까지 우리학교를 중학교 부터는 일본학교를 다녔습니다. 2004년 청소년 대표로 뽑혀 한국에 왔지만 차별을 견디지 못해 일본으로 귀화한 경우입니다. 그래도 그는 우리학교를 다녔기에 우리 성(Lee)을 선택했고 “리 다다나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민족성이 남아있다는 것이겠지요.
지금 제가 처한 이 상황은 저만의 경우가 아니라 모든 조선적 동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다른 분들은 시집와서 다 국적을 바꾸셨습니다. 어떤 분은 rm dlffh 가슴이 무너져 내려 3개월 내내 눈물로 지세우신 분도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한국과 일본이 경기를 하면 어느팀을 응원하냐고 물으신 적도 있습니다. 당연히 한국을 응원합니다. 김치, 신라면 같은 매운 한국음식도 잘 먹습니다. 그리고 김치삼겹살을 처음 먹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매해 1만명의 동포(조선적, 한국국적자 모두 포함)들이 일본으로 귀화를 하고 있고 90퍼센트 이상이 일본사람과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사와 우리학교가 없다면 정말 재일동포가 없어질 지도 모릅니다. (정리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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